평생을 성실한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예순다섯의 상호와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켜온 예순둘의 아내 명숙. 두 사람의 여유로웠던 황혼은 순식간에 차가운 잿빛으로 변해버렸다. 평생 모은 노후 자금을 조금 더 불려보겠다는 얄팍한 욕심에 뛰어든 가상화폐 투자가 끔찍한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화면 속 차트의 붉은 선이 파랗게 곤두박질칠 때마다, 부부가 30년간 피땀으로 일군 아파트와 퇴직금은 허망한 거품처럼 사라졌다. 빚잔치를 끝내고 두 사람이 마주한 현실은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비좁고 퀴퀴한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 방이었다.
처음 1년은 숨을 쉬는 것조차 지옥이었다. 상호는 매일 밤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술병을 껴안았고, 명숙은 서글픈 현실에 밤낮없이 눈물만 훔쳤다. 좁은 방 안에서는 서로를 향한 원망과 한숨만이 떠돌았다. 하지만 바닥에 완전히 닿았다는 것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어느 춥고 어두운 새벽, 열병에 걸려 앓아누운 상호의 거친 숨소리를 듣던 명숙은 이불을 박차고 일어났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지. 우리가 이렇게 끝날 수는 없잖아.”
다음 날부터 명숙은 동네 시장 어귀에 낡은 상자를 엎어놓고 매대를 폈다. 평생 가족들의 입맛을 책임지던 솜씨를 살려 정성껏 반찬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펜만 쥐고 살아온 상호도 마지막 남은 자존심과 체면을 모두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는 새벽 공판장에 나가 무거운 배추와 무를 등짐으로 날랐고, 중고 자전거를 구해 거동이 불편한 동네 사람들에게 반찬 배달을 다녔다. 화면 속에서 요동치던 허황된 숫자가 아니라, 시장통에서 온종일 땀 흘려 쥐게 된 천 원짜리 몇 장이 얼마나 무겁고 값진 것인지 두 사람은 온몸으로 깨달아갔다.
위기는 그들을 주저앉힌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단단히 묶어주었다. 조미료 없이 깔끔한 명숙의 손맛과, 배달을 갈 때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상호의 서글서글한 진심은 금세 동네에 소문이 났다. 정갈한 반찬은 1인 가구와 맞벌이 부부들의 식탁을 사로잡으며 단골을 낳았고, 부르튼 손가락에 파스가 마를 날이 없어도 부부의 얼굴에는 서서히 따뜻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5년의 치열한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축축한 반지하에 살지 않는다. 시장 골목 안쪽, 번듯한 간판을 단 작은 반찬가게를 열었고 가게 위층의 햇살이 포근하게 드는 집으로 이사했다. 비록 수십억을 만지는 대박의 꿈은 사라졌지만, 부부의 낡은 통장에는 매일매일 정직하게 일군 땀방울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가게 문을 닫고 마주 앉은 늦은 저녁 식사 자리, 갓 지은 하얀 쌀밥 위로 짭조름한 깻잎무침을 얹어주며 명숙이 환하게 웃었다. “여보,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어요. 어서 먹어요.” 상호는 굳은살이 훈장처럼 박힌 아내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을 잃고 나락에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혹독한 시련을 딛고 다시 일어선 지금 그들의 곁에는 세상 어떤 일확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눈부시고 단단한 행복이 밥 짓는 냄새와 함께 피어나고 있었다
